선교사이야기 김예성 목사
<큐티프렌즈> 친구들! 간혹 숙제나 공부를 게을리할 때,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배워서 남 주니?”라는 말씀을 들어 보았을 거예요. 그런데 모든 것이 세상과 달라야 하는 예수님의 자녀에게 배움이란 무엇일까요? 오늘은 똑똑한 머리로 열심히 공부해 의사까지 된 남부러울 것 없는 한 청년, 지난 이야기에서 만난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님의 아들인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님의 발자취를 통해 ‘배워서 남 주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알아볼까요?
한 손에는 복음, 한 손에는 의료
윌리엄 벤튼 스크랜턴은 1856년 미국에서 태어났어요. 그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가정에서 자랐어요. 경건한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어머니로부터 신앙을 잘 전수받은 스크랜턴은 미국의 명문 예일대학교와 뉴욕의과대학을 졸업한 유망주였어요. 그의 앞날은 탄탄대로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스크랜턴의 아버지에 이어 할아버지마저 갑자기 숨을 거두는 등, 가정에 잇따라 어려움이 닥쳤어요.
이런 사건을 겪으며,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는 선교사로서 조선에 가기로 결심했어요. 메리는 아들에게도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권했지만, 스크랜턴은 이제 막 병원을 개업했기 때문에 이 제안을 거절했어요. 하지만 장티푸스에 걸려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한 후, 자신을 살리신 주님께 평생을 드리기로 결심했어요. 부유한 가정의 어머니와 아들은 오직 복음을 전하겠다는 목적으로 척박한 땅, 한국으로 향했어요.
생명을 살리고 마음을 치유한 스크랜턴의 의료 선교
스크랜턴 선교사님이 도착한 1885년의 한국은 의료와 교육 등 모든 환경이 너무나 열악했어요. 특히 여성들은 아무리 아파도 남성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려 하지 않았으므로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어요.
스크랜턴 선교사님은 지체하지 않고 병원을 열었어요. 또한 양반과 상민,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치료해 주었으며, 진료비 또한 매우 저렴했어요. 사람들은 처음에는 생김새가 완전히 다른 서양인 의사를 무서워했어요.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 정도였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스크랜턴 선교사님의 헌신적이고 정성 어린 진료에 점점 마음을 열면서, 9개월 동안 500명이 넘는 환자가 몰렸어요. 당시 나라에서 운영하던 제중원보다 훨씬 더 많은 환자가 이곳을 찾은 것이지요. 고종 황제는 스크랜턴 선교사님이 운영하는 병원에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며 격려했어요. 안타깝게도 시병원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어머니인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님과 함께 설립한 최초의 여성 전용 병원인 ‘보구녀관’은 지금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으로 이어지고 있답니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스크랜턴 선교사님은 의사 일에만 매달리지 않았어요. 그는 의사이자 목사로서 상동교회, 아현교회, 동대문교회 등을 개척해 한결같은 사랑으로 한국인을 섬기고 복음을 전했어요. 그리고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에도 참여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일본이 한국을 침략해 국권을 빼앗았어요. 그리고 감리교 선교 본부에서 새로 파견한 해리스 감독은 친일 성향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행동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스크랜턴 선교사님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스크랜턴 선교사님은 자신이 개척한 상동교회에서 물러나게 되었어요. 그러나 끝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동의하는 세력과 맞서 한국인을 보호했어요. 스크랜턴 선교사님은 1917년 일본의 고베에 정착해 사역하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해 1922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어요. 스크랜턴 선교사님은 일본에서도 형편이 어려운 한국 사람들을 돌보고 치료해 주었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모든 것을 가진 촉망받는 청년이 먼 이국땅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한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드나요? 하지만 자신의 지식과 부를 모두 하나님을 위해 사용한 이 청년보다 귀한 삶은 없어요. 자신만 위해 살아가는 사람과 나의 것을 드려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 중 하나님께서 누구를 더욱 기뻐하실지는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지요. <큐티프렌즈> 친구들도 스크랜턴 선교사님처럼 낮은 곳으로 향해, 헌신하고 수고하는 복된 삶을 살기를 기도해요.